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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5.19 오후 5:02:56 / 조회수 7742 / 작성자 강원도원주의료원/ ID admin

자연스러운 일에 대하여 - 이○야 님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외갓집은 원주역 근처의 작은 여인숙이었다. 마당 가운데 수도꼭지가 있고, 여러 개 늘어선 방 끝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낡은 건물. 외갓집이 원래부터 숙박업을 했던 건 아니다. 안방 한쪽 벽에 걸린 대통령 표창장에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함백광업소, 산업 역군. 외할아버지는 광부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평생을 광산에서 일했고 은퇴 후 원주로 이주한 것이다.

막장에 오래 머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외할아버지도 진폐증을 앓았다. 원래도 걸음이 느릿했던 외할아버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느려졌다. 여인숙을 정리하고 얻은 교외의 주택은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600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말년의 외할아버지는 그 거리를 걸으면서도 서너 번은 멈추어야 했다. 길가의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봄날 외할아버지는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었다. 구급차가 처음 향한 곳은 원주에서 가장 큰, 대형상급종합병원이었다. 응급실에서 정신없이 만 하루를 보내고 외할아버지는 응급중환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두면 호흡곤란으로 돌아가실 거였고, 피를 묽게 하는 약품을 사용하면 출혈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 기도에 삽관을 하고 산소를 공급하며 현상을 늦추는 게 전부였다. 외할아버지는 종종 의식을 찾았고 그때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지만 당시에는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없었다. 치료를 중단하면 죽을 것이 자명한 환자는 퇴원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환자가 간절히 원하고 가족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돌아오는 면회 시간에 겨우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외할아버지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갈 거였다.

어차피 나아질 가능성이 없고,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고민 끝에 전원(轉院)을 신청했다. 원주의료원이었다.

원주의료원은 우리 가족에게 꽤 친숙한 곳이다. 대표적으로, 나는 원주의료원에서 태어났다. 돈이 많았다면 제왕절개를 했을 거라고, 언젠가 엄마가 말한 적이 있다. 출생증명서의 끝줄에 적혀 있는 정식 명칭은 지방공사 강원도 원주의료원이었지만, 외할머니는 늘 내가 도립병원에서 태어났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1942도립의원으로 개설돼 40년 동안 이어져 온 원주의료원의 내력 탓이다. 병원이 귀하던 시절, 더구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립병원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개인병원이 카페만큼 늘비한 시대가 된 후로도 원주의료원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체육대회에서 피구를 하다 손가락을 접질렸을 때도, 대학 신입생 시절 과음을 해 멈추지 않는 구토로 속이 뒤집혔을 때도, 상한 케이크를 잘못 먹고 급성 장염으로 설사에 시달렸을 때도 원주의료원을 찾았다. 나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그랬다. 건강검진을 하고, 위염을 치료하고, 발목을 재활했다. 그래서 원주의료원의 풍경은 아주 익숙하다. 좌우로 침대가 늘어선 응급실, 이제 리모델링이 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진 옛 건물의 입원실, 구관과 신관을 잇던 통로,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기다리던 의자, 엘리베이터 앞 자판기.

그러니까, 마지막 병원으로 원주의료원을 선택한 것도 제법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원주의료원 1인실로 옮겨졌고 가족들이 내내 함께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외할머니와 엄마, 외삼촌들이 번갈아 밤새 병실을 지켰고 손주들은 등굣길과 하굣길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대부분 주무셔야 했지만, 고비를 넘긴 후론 상태가 괜찮아져 기도에 삽입했던 관도 제거할 수 있었다. 큰외삼촌이 외할머니의 고향에 장지(葬地)를 마련했다고 하자 외할아버지가 안심하며 미소를 지으셨던 게 선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일은 참, 힘들었다. 특히 첫째인 큰외삼촌은 긴장과 부담으로 며칠씩 잠을 못 이루곤 했다. 수면유도제를 복용하고 보호자 침상에 곯아떨어진 큰외삼촌에게 이불을 덮어드리고 외할아버지 머리맡에 바싹 앉아 보냈던 낮이 기억난다.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 이것저것 체크하고 나가신 후로도, 나는 눈을 감고 계신 외할아버지의 숨을 간헐적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에 대해 자꾸만 생각했다.

외할아버지는 꽃이 다 지고 나무에 새록새록 순이 돋아날 무렵 돌아가셨다. 전후의 나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확히 생각나진 않는다.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느낌은 확실히 남아 있다. 나이든 아내, 장성한 아들 둘과 딸 하나, 또 그들이 새로 만든 가족들까지, 모두가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여 1인실이 꽉 찼다. 외할아버지는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워하시다 마지막에 어머니, 어머니읊조리듯 말하고 곧 숨을 거두셨다. 좌중에서 꾹꾹 눌렀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평안해 보여서, 나는 오히려 조금 괜찮아졌던 것 같다. 곧 의사 선생님이 와 사망을 선고했다.

원주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삼일장을 치렀다. 장례의 경험이 많지도 않았고 상조회사 같은 데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 직원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 정신없이 바빠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슬픔에 잠겨 있을 겨를도 없었다. 다만 중간중간 남은 장면들은 있다. 검정 바지 정장을 입고 하염없이 음식을 나르던 사촌 언니와 나를 보고 조문객들이 야무지다고 칭찬했던 일. 아빠의 친구들이 와서 늦게까지 웃으며 고스톱을 쳐서 내심 미워했던, 그러다 나중에야 그게 위안의 방식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 염을 할 때 외할아버지의 시신을 뒤집자 얼굴을 가린 흰 천에 왈칵 쏟아졌던 붉은 피. 엄마는 등을 돌렸고 내내 울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염을 마치고 나서야 눈물을 닦았다.

장의차는 외갓집을 천천히 돌아 묏자리가 마련된 외할머니의 고향으로 향했다. 짧고도 길었던 장례 절차의 마지막은 회다지소리와 곡소리였고, 자꾸 주변을 맴도는 나비를 보고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가 죽어 나뱅이가 되었나 보다고 하셨다.

올해 봄 코로나19 검사를 위해 선별진료소를 찾았을 때에도 문득 옛 생각이 났다. 같은 계절이라서 그렇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원주의료원 앞을 지나는 34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원주의료원으로 향하는 길, 버스 창밖으로는 목련이 만개했고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건너편에 하늘하늘 늘어선 벚꽃이 보였다.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내 되뇌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야,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여기서 내가 태어나고 외할아버지가 떠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고.

 

 

나는 원주의료원, 하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 한 달여의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건 정말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